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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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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영 코치. 달라스 테니스인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2015년 미주 한인 체전에 테니스 팀을 이끌고 참여하여 아무도 예상 못했던 단체 1위를 차지하고 돌아온 테니스 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다.


치열한 한국의 자녀 교육과 정신없이 바쁜 삶을 벗어나기 위해 결정한 미국 이민의 길. 한국에서 살 땐 협회 일과 회사일, 코치 생활과 테니스 클럽 경영인 등 감투만 10여 개를 지녀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힘들 정도였다. 


달라스에 정착해 테니스 코치로, 테니스계의 큰 형님으로 '기댈 나무'가 되어주고 있는 최수영 코치는 1946년 생, 한국나이로 올해 70세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은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그는 ‘테니스가 건강의 비결’이라고 자랑한다. 


테니스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다. 부산 직할시가 경상남도에서 분리되는 바람에 전국체전에 단독으로 출전하게 됐을 때다. 
갑작스런 ‘독립’에 부산 직할시는 선수가 급히 필요하게 됐고 경남상고에 재학중이던 최수영 코치가 대표로 출전하게 됐다.


“당시엔 웬만한 재력이 아니고서는 테니스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테니스 인구가 많지 않았어요. 라켓, 공, 신발 등이 엄청나게 비쌌죠.”
그렇게 시작한 테니스는 그를 전국대회 메달리스트까지 이끌었다. 단내나는 9개월간의 맹훈련, 전국 1위였던 3학년 선배의 수준 높은 지도, 영국에서 테니스를 배워 온 코치의 선진 기술을 통해 전국체전 3위의 기염을 토했다.


“맨땅에 헤딩이었죠. 9개월 훈련하고 동메달 땄으니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매일 매일 땡볕에 대 여섯 시간씩 땀 흘렸던 그때의 맹 훈련은 평생의 테니스 기본을 세워주고 기량을 살찌워 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입시를 위해 잠시 테니스를 접었다. 선수로서의 미래가 불투명하던 당시 테니스계의 사정도 그랬지만 입시제도가 학력고사 체제로 전환되기 전 마지막 해였기에 그 해를 지나면 재수가 힘들다는 주위의 조언도 한몫했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으로 입시에 몰두하고 동국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서도 꾸준히 클럽활동 등으로 테니스 라켓을 놓지 않았어요. 테니스는 대학생활 중에도 나의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자 취미였죠.”


1976년 대학 졸업 후 최 코치는 당시 유수의 보험사였던 제일 생명 보험에 입사했다. 
여의도에 본사를 두고 있던 회사는 약 4,000여 평의 테니스 코트를 여의도 사옥 근처에 운영하고 있었고, 최 코치가 테니스 코트의 운영을 맡게 된다. 


그 후 근무지를 인천으로 옮기게 되고 여의도 테니스장 부지가 포항제철(현 포스코)로 매각추진되면서 테니스 장과의 인연이 끝날 뻔 했지만, 포철에서 부지에 건물을 세우려던 계획이 무산되면서 테니스 장이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그렇게 유지된 여의도 테니스코트와의 인연은 20년 넘게 지속됐다.
“여의도 입지 특성상 정부단체, 기업 등의 테니스 부서들이 우리 테니스 장에서 시합을 많이 가졌어요. 그렇게 맺어진 인연들로 시작한 자리가 한국 중·고교 테니스협회 수석 부회장 자리입니다.”


1980년부터 8년동안 맡게 된 중고교 테니스협회 연맹 수석부회장. 이 자리를 맡는 동안 한국은 올림픽 유치, 아시안 게임 개최 등 스포츠 붐이 일게 되었고 세계 스포츠 계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호기심을 갖게 된 시기였다. 


이에 힘입어 최 코치는 주니어 국가 대표진을 이끌고 전 세계 대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 중 가장 큰 수확은 독일에서 개최된 제10회 유럽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동양권 최초로 우승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도 대만·홍콩·미국·호주·필리핀 등 여러나라를 다니며 테니스로 국위를 선양하게 된다.
“당시 협회 활동을 할 때는 테니스장을 운영하며 돈도 많이 벌었어요. 주니어 선수들 장학금도 주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지방에서 올라온 선수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도 했었는데 그 선수들이 지금 현재 한국 곳곳에서 코치와 협회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보람이 됩니다.”

 

미주체전 테니스 1위의 '주역'

 

“기독교 인으로서 내가 가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묵상하면서 내가 남보다 잘 하는 것이 사명이지 않을까 하는 응답을 받았어요. 생각해 보니 ‘테니스’밖에 없었습니다. 가르치고, 선수를 양성하는 일에 탁월한 재능이 있으니 이 사명을 잘 받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니 달라스에서 후배를 양성하는 일에 힘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코치는 어느날 후배를 만나게 된다. 알고보니 그 후배가 미주 총 연맹 테니스 협회장이 된 신원창 씨. 그에게 달라스 테니스에 대해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꼴찌”였다.
후배에게 질 수 없다는 오기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때부터 달라스에 좋은 선수를 발굴해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2015년 워싱턴 미주 체전을 통해 그 결실을 맺게 된다.

 

53년의 노하우, 후배양성에 헌신

 

최 코치는 주니어 선수들의 성공 비결의 세가지 열쇠를 제안한다.
첫번째는 아이들의 인성(영성), 두번째는 부모의 합리적이고 꾸준한 뒷받침, 세번째는 코치의 열정이다. 


이 세가지가 조화를 이루더라도 더욱 중요한 것은 아이의 자발적인 동기다.
“부모가 억지로 시켰거나 하기 싫은 운동을 억지로 하게 되면 발전이 없다는 것이 53년 테니스 인생의 길목에서 얻은 노하우라면 노하우라 할 수 있습니다. 세가지 성공 비결에 아이의 자발적인 의욕, 거기에 잠재력이라는 양념이 더해지면 고속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최 코치를 아는 이들은 그가 주니어부 테니스 시스템을 정확히 알고 있고 현재 테니스 계의 기술적 변화에 민감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평한다. 그만큼 인재를 알아보는 눈과 53년 경력으로 쌓인 노하우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1998년 말, 일보다 가족을 택해 감행한 미국 이민의 길. 그렇게 시작된 달라스와의 인연과 삶 속에서도 그의 테니스 열정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최 코치는 현재 달라스 테니스 협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협회의 임원으로서 유소년 부 장학 사업 및, 장년부 선수 발굴을 통해 2017년 달라스 미주 체전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최 코치의 굳은 의지를 엿 볼 수 있었다.


“2017년에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둬 그동안 테니스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중부에 새로운 ‘중부시대’를 개막하고 앞으로는 테니스 하면 ‘달라스’라는 평을 듣게 만드는 것이 나의 꿈 입니다.”


달라스 테니스 ‘대부’, 최 코치의 푸른 꿈이 지속적으로 열매 맺어 달라스 테니스 계가 미주 한인 테니스 계의 모범으로써 큰 숲으로 빚어지길 기대해 본다.